센티멘탈 스토리

글/그림 : 낭만소년

▣ 오감도(烏瞰圖) 초(秒) 시(詩) 제1호 ▣

 

 

 

 

모든 시의 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취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또는 다다이즘(dadaism) 경향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상태의 도면을 일러 '조감도(鳥瞰圖)'라 하지 '오감도(烏瞰圖)'라고는 하지 않는다. 연재시 신문 조판 과정에서의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이상한 시를 쓴 이상이고 보면 능히 제목부터 의도적으로 국어 사전에도 없는 이러한 단어를 시의 표제로 삼았을 성싶다.


이 [시 제1호]에서 시적 자아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조감하고 있는데,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꾼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타난 현상만으로만 보면, 풍경을 조감하는 시적 화자가 자신을 새가 아니라 까마귀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이자 불길한 새의 표상인 까마귀가 아해들이 질주하는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이 작품은 곧 자기 풍자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13'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의 의미는 (1)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 (2)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 (3)무수(無數)의 상징 (4)'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로서의 상징 (5)일종의 국외적(局外的) 성격을 띤 사물을 상징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작품에서의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감도'의 까마귀의 불길함과 연관지어 볼 때, 이 13이라는 숫자도 불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13인의 아해 모두가 '무섭다'며 질주하는 것은 공포심 때문이다. 아해들이 질주하는 길이 막다른 골목이기에 그들이 공포에 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상관없다고 한 것을 보면 아해들의 공포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공포는 곧 불안에 가까운 것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는 결국 불안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질주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정체 모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불안감을 갖고 있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까마귀가 내려다 보는 풍경이란 더욱 불안하고 음산한 느낌까지도 준다.


그런데 질주하는 13인의 아해 중, 무서운 아해나 무서워하는 아해가 몇이든 상관없다고 한다. 그것은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가 무섭고 누가 무서워하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이자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반어적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무섭고, 무서워하는 사이가 되어 13인의 아해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는 존재요,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므로 질주하는 곳이 막다른 골목이건 뚫린 골목이건 간에 어디에서도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도로로 질주해도 결국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마지막 행에서는 13인의 아해가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건 불안에 떨며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들. 이것이 바로 시인 이상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바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상호 불신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불안 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13인의 아해는 맹목적인 자신의 삶을 향해 그저 질주할 뿐이다. 그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는 까마귀 이상은 아마도 더욱 불안해하며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가슴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고독을 막다른 골목으로 삼아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 상황을 보여 주고 있으며, 뚫린 골목으로 나타난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라도 잡아 보려고 하는 현실의 위기 의식을 도식적으로 구도화한 이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 전체가 건축 설계도처럼 직선이나 사각도형을 이루고 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형성은 더욱 강조되고, 모든 문자들은 매스게임을 하듯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다. 숫자적이며 기하학적이고, 획일적이며 반복적인 그 도형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일 것이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아이들을 달리게 하는 무서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질주는 쫓기고 쫓는 끝없는 무한 질주라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로 바뀌게 된다. 즉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하는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상(李箱)의 시 속에서는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의 그 차이와 대립함이 말소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만이 아니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라는 처음의 진술 역시 뒤에 오면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고 뒤집힌다. 골목길이나 뚫린 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질주하는 이 도로 상황은 이상(李箱) 이후의 시대에 유행했던 [부조리]라고 불려지는 그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이가 곧 무서운 아이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사르트르의 [타자(他者) 이론]과 같은 것이 된다. 즉, 내가 타자(他者)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 속에 타자(他者)를 구속하고 정복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타자(他者)가 나를 볼 때에는 나의 존재가 그의 시선 속에서 징발된다. 거미가 먹이를 녹여 먹듯이 남을 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자신의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동시에 보임을 당한다. 즉, 우리는 무서워하는 아이이며 동시에 무서운 아이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가 지닌 절대적이고 비정적(非情的) 이미지, 기하학적 도형 즉 '文明의 鳥瞰圖'를 만들어내는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그리고 까마귀와 조응 관계를 이룬 '13'이란 숫자의 불길 . 불안한 이미지 등에서 우리는《오감도(烏瞰圖)》에 내재된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 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鍼)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神經網)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穴)을 찾는 작업이다.


이상(李箱)에 의해서 한국시는 처음으로 표현(表現)이 아니라 관찰(觀察)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認識)의 양식(樣式)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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